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해신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은 학이 날개를 펼치는 전술??
    역사문화 2014. 8. 4. 22:06

    한산도 대첩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이며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좁은 해협이라 전투하기에 매우 좁았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들의 행선에 지장을 줄 것이 분명했던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 -조선
    • -충무공 이순신,원균,이억기,권준
    • -전선 55척
    • -전선파손없음.3명 전사, 10여 명 부상


    • -일본
    • -와키자카 야스하루,와키자카 사헤에,와타나베 시치에몬,마나베 사마노조
    • -전선 73척,수군 4~5000명
    • -47척 침몰, 12척 나포 총 59척 전선 상실, 약 4000명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자살)
    이미지 출처:ⓒwiki


    조선 수군의 작전은 성공하였다. 5~6척으로 구성된 적의 소규모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이들을 조선 수군의 모든 함대라고 착각하여 전 함대가 그들을 추격하였다. 일본 함대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대기하던 함대와 함께 전 조선 함대가 뱃길을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전에서 사용하던 전형적인 포위-섬멸전의 형태다. 전 병력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이 층각대선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수군장 와키사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일본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대는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병력 4~5000명(고려선전기 등을 토대로 마치 한산해전에 1500명이 참전했다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일본 사료에도 그러한 말은 없다. 아다케급 함선부터가 7척 참여했는데 1500명이 참전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무리수이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사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순신 장계에는 400명, 협판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자결)하였다.


    이 전투는 행주대첩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로 승서되었다. 

    - ⓒwiki -


Designed by Tistory.